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드디어 읽었다. 이미 유행이 지난 책이지만, 내가 현재 하는 고민과 잘 맞물린 책이다. 격동하는 이 시대가 어디로 가는지, 그 안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해답을 찾은건 아니다. 다만 그가 던진 질문이 나를 흥분시켰다. 지금껏 품어온 인간사에 대한 의문도 해소하고, 동시에 호모 사피엔스로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뇌를 자극시켰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건 오빠랑 지대넓얖 '인공지능' 편을 들으면서 이다.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구글의 인공지능 권위자는 가까운 미래(2042년쯤)에 특이점이 온다고 예언했다. 종교적이거나 감에 의지한 예언이 아닌, 철저한 기술중심적인 근거로 든 예언이었다. 기술 발전의 속도는 지수 그래프처럼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팽창은 곧 창조자인 인간조차 알 수 없는 무한의 영역으로 뻗어나가게 될 것이다. 그 지점을 그는 특이점이라고 제시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직 주니어에 불과하지만, 나름 현재 세상을 움직이는 기술분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초자아를 가진 로봇따위가 아니다. 하지만 로봇에게 자아가 없어도, 그가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력을 가지게 된다면? 극단적으로는 '죽음'조차 해결하게 된다면? 인류에게 가장 큰 난제였던 죽음을 통제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세상을 보고 싶은 기대감도 생겼다. 그리고 그 세상이 도래했을 때 과연 인류는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이게 세상은 어떻게 바뀔지,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할 지에 대한 내 고민의 시작이었다.
사피엔스는 이런 내 의문을 쏙쏙 골라 대답한 책이다. 혹자는 너무 얕게 다뤘다고도 하지만, 내겐 이 정도만으로도 벅찼다. 한 권의 책에 대체 몇개 분야가 들어가있는지. 생물학, 경제학, 철학, 역사학, 심리학 등등등..다양한 분야를 다뤘기 때문일까, 유발 하라리 또한 동아시아권에 대한 이해가 깊진 않아보였다(책에서 가볍게 다루느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중국과 동아시아를 싸그리 뭉뚱그려버린 건 참 유감스럽다. 아무튼, 여러 분야가 얽혀 인류의 빅히스토리를 다뤘다는 게 놀라웠다.
놀라운 지점은 참 여러가지인데, 첫 장에서 우리에게 형제 종이 있었다는 게 참 충격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형제를 모조리 살해하고 살아남은 종이라는 것도. 심지어 지구상에 있는 '그들'까지도 모조리 말살하고, 남아있는 이용가치가 있는 가축들은 생명권보다는 기계화시켜버리고 있다는 부분에서는 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순간 채식주의자를 선언할 뻔 했다; 하지만 나 또한 이기적인 사피엔스인지라, 컨베이어벨트 위의 병아리 사진을 손으로 가릴 수 밖에 없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는 낙농업 산업의 비극을 외면하기란 이렇게나 쉽다. 계속해서 자행되는 인류의 이기주의 끝이 어딜지도 궁금하다. 과연 인류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벌을 받게 될까? 아니면 기술의 발전보다 파멸로 먼저 들어서게 될까?
농업혁명이 우리 종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점도 신선했다. 현대에 사는 회의주의자나 도시의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참 희소식이겠다 싶었다. 인류를 이때까지 발전시켰다고 믿은 혁명들이, 사실은 우리 종에게 부작용을 주는 블랙홀이었다니. 이제는 한 명의 개인이 발을 빼기 힘들 정도가 됐지만, 유전자의 힘은 아주 강력해서 자꾸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이 계속해서 보인다. 이를테면, '나는 자연인이다'나 '리틀 포레스트'같은 자연주의적인 프로그램이 그렇다. 하긴, 몇만년동안 진화해온 유전자 특질을 몇천년만에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일 것이다.
유전자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인간이 하는 것 중에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없다는 부분이 가장 새로운 이론이었다. 하다못해 동성애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왜냐면 가능하기 때문에!! 반면, 인간은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없다. 순간이동도 할 수 없다. 그런 것은 자연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다.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아무리 지배한다한들,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발달해온 신체를 가진 이상 과연 부자연스러운 능력을 가질 수 있게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파트를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성별을 바꾸려는 사람들이다. 성별을 바꾸는 건 수술로 가능하다. 그러나 유지하는 일은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 유투브만 봐도 많은 트렌스젠더들이 하루에 몇분이라도 작업을 하지 않으면 신체가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한다고들 얘기한다. 그렇다면 자연은 성별을 바꾸는 일을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신체를 입맛에 맞게 개조하는 성형수술 또한 부작용이 많다.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다. 현대 의학은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자연스럽지 않은 일은 몸의 저항을 받는다. 기술 진화가 무한대로 이루어진다한들,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는 일은 더 많아질텐데, 그때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까? 우리는 스스로 인간 키메라를 보게 되는 거 아닐까. 아니면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인간 키메라가 있는 건 아닐까...이 책을 읽고나면 사피엔스가 그런 짓을 자행했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이렇게 쓰다보니, 인류 역사를 굉장히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인간사에 걸친 비극은 안타깝고, 구역질이 나지만 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일 뿐이다. 역사는 굉장히 길어서, 그 모든 역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역사에서 나는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미래에 그냥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사람들'이라고 뭉뚱그려서 회자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냥 내가 처한 상황에, 내 입맛에 맞게 행동하자는게 내 결론이다. 갑자기 사피엔스들은 반성해야한다고 회개를 외치는 운동가나 종교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한 명의 사피엔스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평화로우면서, 사피엔스가 직접 일으키는 진화를 목격할 4차 산업혁명을 앞둔 시대를 살아가는 게 다행이라고 까지 생각한다. 나는 호기심 많은 사피엔스여서, 이왕이면 최대한 기술의 장점을 누리고 싶을 뿐이다.
기아, 빈곤, 질병 같은 1차적인 문제를 해결한 사피엔스들은, 이제야 개개인의 '행복'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문득 이런 말이 생각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존나 멀리있는 것이다...아마 이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행복은 정말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뇌의 반응에 불과하다고 한다. 행복을 유발하는 물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쾌감과 비슷할 뿐 정확한 행복의 정의는 여전히 연구 중에 있다. 인간이 이렇게나 기술의 발전을 해오면서, 정작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나도 모른다는 건 놀랍다. 하지만 그럴법도 한게, 행복을 고민하기에는 역사가 너무 빈곤했고 이토록 개인에 집중한 이데올로기는 현대 인류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중 하나는, 부와 쾌감은 비례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부조차 평생의 쾌감을 만들어주진 못한다. 결국 부가 행복의 결정요인은 아니란 게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또,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한다는 부처의 가르침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너무 행복할때도, 너무 불안할때도 아닌 그냥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는 날이다. 하다못해 강아지의 평온도 강조하는 세상에서, 왜 사람은 행복만 추구하려고 할까? 너무 큰 감정의 변화폭을 겪는건 사피엔스에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거다. 왜냐하면 인간 유전자는 평온하게 자기 영역에서 공동체와 함께 지내다가 죽는 방향으로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5만명, 10만명 앞에서 공연하는 가수나 국민적인 관심을 받는 사피엔스가 머리에 질병을 얻게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큰 집단을 책임지는 방향으로는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세계는 점점 더 큰 하나의 집단으로 변모하고 있다. 가족 결속력은 약해진대신 사피엔스의 결속은 거대해졌다. 70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베이스로 두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한 한명'과 '덜 중요한 한명'의 구분이 심화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죽이는 비극을 더 많이 자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게 기술의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겠다.
공동체 중심으로 사피엔스가 진화됐다는 건 싫으면서 날 체념하게 했다. 신기하게도 오늘날 사피엔스들은 공동체 생활을 점점 꺼리는데, 신체는 그에 맞게 진화돼왔다니. 이게 바로 인지부조화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가 보다. 하긴 나만해도 혼자서 시간을 보내면 심심해하니까 말이다.
아...많은 생각들을 쏟아냈는데, 이렇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이 반갑고 좋다. 지식 습득에 대한 내 욕구를 한껏 채워줬다. 당분간은 밥을 안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래 인간상을 예측한 '호모데우스'도 빨리 읽고 싶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브랜딩을 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현재가 너무 좋다. 결국 사피엔스는 이렇게 빅히스토리를 던져줘도 오늘 당장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기 마련이다. 아마 잡스도 그랬을거다. 그래서 결국 나도 사피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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